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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테리한 일상

페이창펀(肥肠粉)

by MrㅡLee 2022. 8. 29.

얼마전, 칠칠치 못하게 넘어져, 우측 엄지발가락 골절상 전치 5주 치료 진단을 받고 발목까지 깁스를 감게 되었었다.

어색한 깁스 발로 낑낑거리면서 계단을 내려오던 어느 주말 아침, 아내가 유난히 측은한 눈빛으로 물었다.

“뭐 먹고 싶은거 있어? 발가락 빨리 나으라고 내가 사줄게.”

 

그 말을 듣자 마자 눈 앞에 한가지 음식이 아른거렸다.

돼지 내장을 푹 삶아 구수하고 진한 육수에 비교적 부담이 적고 식감이 독특한 당면사리, 그 위에 아삭거리는 숙주와 푸짐하게 얹어진 곱창. 매콤얼얼한 홍유와 풍미를 살려주는 흑초를 곁들여 먹으면 이마에는 땀이 송글송글 맺히겠지만, 금방이라도 뼈가 붙을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그 음식.

 

“페이창펀( 肥肠粉; 곱창국수)을 먹으러 가자”

 

페이창펀을 먹기 위해서는 집에서 한 시간 넘게 운전을 해서 서귀포시 성산읍까지 50여 Km를 가야했다.

식사 한끼를 위해서 결코 가까운 거리가 아니다.

특히, 제주도에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길을 나섰다.

운전하고 가는 내내 홍유와 흑초의 비율을 어떻게 가미해 먹을까 고민했고, 마치 어머니의 월급날 간간히 맛보았던 양념치킨을 고대하는 초등학생 때의 심정이 된 듯 했다.

 

설레이는 마음으로 도착했는데 식당 입구에는 가게 사정상 당분간 휴업한다는 메모가 붙어 있었다.

아, 안돼.

이럴 수는 없는 거였다.

마치 페이창펀을 먹기 위해 발가락을 다친 것 마냥 설레는 마음으로 달려왔는데 휴업이라니.

짜증도 났지만, 누구나 수긍할 수 밖에 없는 사정이었기에 아쉽게 발길을 돌려야만 했다.

발길을 돌리며 사장님께 문자메시지로 사정이 원활히 해결되어 빠른 시일 내 영업을 재개하길 함께 기원한다고 인사를 남겼다.

 

그렇게 3주가 지났을 무렵 아내가 얘기를 꺼냈다.

“조금전에 페이창펀 식당에 전화해봤는데 정상 영업중이래”

난 바로 대답했다.

“가자. 차 타.”

 

다시 설레기 시작했다.

쫄깃쫄깃한 곱창과 부들거리는 당면, 그 사이 아삭한 숙주의 식감, 홍유와 흑초의 풍미를 머금은 구수한 육수는 없는 숙취도 해장해 줄 것만 같았다.

생각만 해도 입에 군침이 돌기 시작했다.

영화 '호우시절'에서 정우성 배우가 페이창펀을 맛보는 장면... 영화에서 주인공은 생소한 맛에 뱉어내고 만다. ㅠㅜ 이 맛있는 걸...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슬쩍 가게안을 들여다 봤는데 다행히도 가게 내부에 조명이 켜져 있었고, 북적북적 손님들도 많아 보였다.

“나이스.”

살짝 주먹을 움켜쥐고 나지막이 외쳤다.

안내 받은 자리에 앉자마자 고민도 없이 주문했다.

“홍탕우육면(아내의 pick)과 페이창펀 곱빼기 주세요.”

“아이고, 어쩌죠? 숙주가 소진되어 페이창펀은 주문이 안됩니다.”

종업원 분께서 난감한 표정으로 대답하셨다.

오마이갓.

 

종업원분의 얘기를 듣고 곧바로 드러난 실망감 역력한 내 표정을 본 아내가 물었다.

“숙주 빼고 페이창펀을 만들어 주실 수 있으신가요?”

“네, 가능은 합니다.”

‘그래요. 가능은 하겠죠. 그렇지만 숙주의 식감이 빠진 페이창펀은 오랜 기다림에 지쳐있는 나에게 부족하게만 느껴질게 뻔해서 실망할지도 모른다고요. 그렇다고 페이창펀을 포기하고 홍탕우육면을 먹고 돌아가기에는 이미 난 너무 멀리 와 버린걸요.’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며 쉽사리 주문을 하지 못했다.

그 때 종업원 분께서 한마디 덧붙이셨다.

“브레이크타임에 숙주를 사러 갈 거라, 저녁에는 식사 가능합니다. 혹시 저녁에 다시 오실 수 있으면 드실 수 있게 준비해 놓겠습니다.”

난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그럼 저녁에 다시 오겠습니다.”

 

당황스러운 표정의 아내 손을 잡고 서둘러 식당을 나왔다.

그리고 차에 앉아 설득을 시작했다.

이 인근에 아주 가볼만한 커피숍도 있고.

유명한 갤러리도 있어.

아니, 조금 더 가면 네가 좋아하는 빙수집도 있어.

블라블라블라. (내가 얼마나 페이창펀을 좋아하고, 먹고 싶었는지 알지? 를 돌리고 돌려 표현하는 소리)

결과는.

성공.

여차저차 다른 곳들에서 다섯 시간여를 보내고 저녁에 다시 식당을 찾았다.

마치, 빚을 받으러 온 사람처럼 당당하게 식당에 입장해 자리에 앉음과 동시에 페이창펀을 주문했다. 당연히 곱빼기로.

오랜 기다림 때문이었을까?

당면은 탱글거리며 입에서 춤췄고, 곱창과 아삭한 숙주는 윗니와 아랫니 사이에서 쫄깃아삭한 소리를 내며 노래했다. 구수한 육수는 매콤하고 칼칼한 홍유와 달콤하고 시큼한 흑초가 적당히 어우러지며, 간 구석에 남아있던 알코올의 흔적을 지워 주는 듯 했다.

후루룩, 쩝쩝, 허, 크…

나도 모르게 식사 예의범절에 어긋나는 온갖 소리를 내가며 그 어느 때 보다 맛있게 먹었다.

 

완벽한 식사를 마치고 계산대에 섰는데 사장님께서 말씀하셨다.

“이번 식사에서 페이창펀 값은 받지 않겠어요. 여러번 헛걸음한게 미안하고, 우리 식당 음식을 이렇게까지 좋아해주는게 고마워서요.”

아니!

공짜로 주신다고? 게다가 곱빼기인데?

“아이고, 이런… 생각치도 못한 호의에 고맙습니다. 솔직히 집에서 오기에 쉬운 거리는 아닌데… 앞으로 더 노력해 볼게요. 정말 고맙고 정말 잘 먹었습니다.”

 

그 전에도 기회가 될때마다 갔던 곳이지만, 이제는 일부러 더 자주 가야할 이유가 생긴 진짜 단골식당이 한 곳 더 생겼다.

나는 진심으로 그 식당의 음식을 좋아했기에 적극적으로 표현했고, 식당 사장님은 맛있는 음식에 진심을 담아 화답해 주셨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그저 곱창국수 한 그릇일 뿐이지만 한 사람은 그 국수 한 그릇을 먹으며 아주 만족스러운 기분을 느끼고, 국수를 만드는 사람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흐뭇해 하는 그 과정을 통해 아무런 연도 없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진심이 통했다는 것이 사소하지만 참 즐겁고 재미있는 행복한 일상이지 않겠나.

 

어느 새 바람이 차가워져 페이창펀이 땡기는 처서의 밤, 그날의 그 사소하지만 행복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끄적여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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